영화 ‘전설의 주먹’과 폭력의 추억

전설의 주먹 감독 강우석 출연 황정민, 유준상, 이요원, 윤제문, 정웅인, 성지루 개봉 2013.04.10.

1. 강우석 감독의 영화 '전설의 주먹'

“내가 17대 1로 녀석들과 붙었을 때…”

영화 ‘비트’에서 임창정이 17대 1을 언급했을 때만 해도, 이 말이 이처럼 널리 쓰이게 될 줄 몰랐을 것입니다. 영화 속 대사였던 ‘17대 1’이라는 말이 혼자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을 뜻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돼 버렸습니다. 학창 시절 우리 학교 잘 나가는 형이 옆 학교 아이들 여러 명을 혈혈단신 맨주먹 하나로 쓰러뜨렸다는 류의 전설적인 이야기 하나쯤은 아마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묘한 대리만족, 무협지나 홍콩영화의 주인공을 대하는 듯한 경외감, 그리고 두려움 같은 복잡다단한 느낌들이 동시에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동명의 웹툰을 각색한 영화 ‘전설의 주먹’은 바로 그 전설의 17대 1의 주인공, 왕년에 잘 나갔던 주먹들의 현재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리얼리티 격투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프로그램 제목이 ‘전설의 주먹’입니다. 학창 시절 날고 긴다던 주먹의 전설들을 발굴해 진짜 격투 무대에 세우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입니다. 예전에는 잘 나갔다지만 세월과 세파에 찌든 왕년의 주먹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방송국에선 뭔가 한 방을 터뜨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 잡아줄 출연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학창 시절 88 올림픽 복싱 유망주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국숫집 사장 임덕규(황정민 역)도 이 프로그램의 출연 제의를 받지만, 주먹질 같은 건 안 한다며 출연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러나 혼자 키우던 딸이 사고를 쳐서 급하게 돈이 필요한 상황을 마주하고, 결국 우스꽝스럽게만 여기던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됩니다. 첫 출연 무대에서 현직 격투기 선수를 쓰러뜨리고, 연전연승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덕규. 이러한 덕규에게 과거 한 패거리로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도전해 오며 그의 암울했던 과거들도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덕규는 가족과 자신의 자존심, 친구들과의 의리를 모두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승부에 돌입합니다.

2. 현실적인 드라마

강우석 감독은 스릴러의 성격이 강했던 원작과 달리 ‘전설의 주먹’을 철저히 중년 남성들의 현실 드라마로 바꿔놓았습니다. 기러기 아빠로 아이의 학비를 안정적으로 대기 위해 고교 동창인 회장의 온갖 지저분한 일처리를 도맡아 하는 상훈(유준상)과 친구를 때린 딸을 위해 무릎을 꿇기도 하고, 기꺼이 쇼에 나가 구경거리가 되는 덕규에게 힘든 삶을 살아가며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을 투영합니다.

 

“괴롭히긴, 그냥 장난이었지”

준수한 액션 영화로, 사회성 짙은 드라마로 쏠쏠한 재미를 주는 ‘전설의 주먹’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지막 처절했던 격투신이나 과거를 추억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아닌, 짧은 시간 등장했던 덕규의 동창회 장면입니다. TV쇼를 통해 스타가 된 덕규가 동창회에 등장하자, 이제 아저씨가 된 덕규의 동창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처음엔 스타로 돌아온 친구를 반가운 듯 맞아줬지만, 이내 가슴속에 담아뒀던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동창들이 학창 시절 괴롭힘의 이유를 묻자 “괴롭히긴, 그냥 장난이었지”라는 덕규의 답에 “기억이란 참 편리하다”는 친구의 비아냥이 돌아옵니다. 옆 학교 아이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다 덕규의 도움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던 친구는 “덕규, 니가 동창회에 나올 줄 몰랐다. 난 너한테 하나도 고맙지 않다”라고 쏘아 붙입니다. 도움을 이유로 당한 괴롭힘과 하대가 더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짧은 장면은 40대 가장의 성공 신화로 흘러갈 것만 같던 영화의 빤한 스토리를 국가대표 선발에 실패하고 망가져갔던 덕규의 어두웠던 과거의 이야기로 되돌려 놓으며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과 마음에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임팩트 있게 전달합니다.

 

아이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둘렀던 덕규에게도 그만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 이유가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조직 폭력배들과 싸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덕규는 주먹의 전설이 됐을지 모르지만, 그의 폭력에 상처받았던 사람들에게 덕규는 그저 악몽과 같은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남은 상처는 수십 년이 지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가해자였던 덕규와 달리 딸은 왕따 피해자로 나오는 설정 또한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던 폭력이 어느 순간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폭력이 때로는 효율적인 수단처럼 인식될 수 있지만, 결코 폭력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 적은 없습니다.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종류의 폭력을 재생산해 낼 뿐입니다. 폭력이 전설로 포장될 수는 있지만, 결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강우석 감독은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폭력을 손쉬운 재미거리로 삼지 않고 사려 깊은 연출을 통해 폭력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